인터랙티브 | ‘스무살 참여연대’ 이태호 사무처장이 그리는 시민운동

‘스무살 참여연대’
이태호 사무처장이 그리는
시민운동

인터랙티브 인터뷰 이태호

글_최지현 기자 사진_양지웅 기자 영상_최재덕 기자 최종편집 : 2014.11.27

성명·논평 발표 5383건, 고소고발 등 공익소송 제기 357건, 감사청구 등 행정절차 활용 265건, 입법청원·발의·입법의견 553건, 이슈리포트·보고서 발간 354건, 토론회·기자회견·언론기획 등 공론화 활동 1955건···.

1994년에 태어나 올해 스무 살이 된 참여연대가 걸어온 발걸음이다. 시민사회단체로 본다면 상당한 활동을 해온 셈이다. 그동안 거쳐 온 정권만 해도 박근혜 정부를 포함해 모두 다섯이다. 그만큼 참여연대의 역사도 파란만장하다.

참여연대의 성장 곡선을 그려본다면 처음 2~3년은 숨을 고르는 시기였고, 1996년 반부패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사회에 파장을 일으켰다. 시민운동이 가장 정점을 찍었을 때엔 노무현 정권 초기였다. 그러다가 노무현 정부 후반기 땐 정체됐고, 오히려 보수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꾸준하게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이것은 이태호 사무처장의 설명이다.

하지만 스무 살이 그렇듯 앞으로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 한편으론 기대감도, 한편으론 두려움도 클 것이다. 지난 4일 이태호 처장의 인터뷰가 진행된 서울 종로구 통인동 참여연대 건물 옥상에선 청와대의 파란 지붕이 저 멀리 보였다. 보수정권의 연장선 위에서 참여연대는 어떤 그림을 그려나갈까.

부패방지운동으로 시작된 이태호의 참여연대

이태호 사무처장은 참여연대의 산 증인이다. 서울대 86학번인 그는 서른을 바라보는 94~95년까지 학생운동에 참여하다가, 참여연대가 두 살 되던 1995년 5월 시민운동에 뛰어들었다. 참여연대 상근자는 당시 이 처장을 포함해 15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가 워밍업을 마치고 1996년 ‘맑은 사회 만들기’라는 반부패 운동을 하는 팀을 이끌면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그는 참여연대 ‘최초의 팀장’이기도 했다.

“그때 민주화 직후였고 세계적으로 보면 탈냉전 시기였어요. 그래서 특정 이념에 치우친 운동보다는 조금 시민들이랑 부대끼면서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었어요. 특히 부패방지운동, 반부패운동 같은 것을 해보고 싶었는데 둘러보다가 막 만들어진 참여연대에서 할 수 있을 것 같아 들어오게 됐죠.”

부패방지운동은 참여연대가 초기에 역점을 뒀던 중요한 프로젝트였다. 1996년 부패방지법 제정 입법 청원을 했고, 무려 5년이 지난 2001년 부패방지법 제정이라는 결실을 맺었다. 참여연대 활동은 당시 사회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95년 상반기에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하반기에는 전두환 노태우가 재벌로부터 1조원가량 받은 어마어마한 뇌물사건이 터졌어요. 그래서 지금 세월호 특별법을 만드는 과정에서 기소권·수사권 논쟁이 일어난 것과 마찬가지로, 당시 (우리가 제안한) 부패방지법안에 고위공직자비리처를 두고 특검에 기소권·수사권을 주도록 하는 내용을 담으려고 했어요.”

쉽지만은 않았다. 부패방지법은 결국 IMF 이후 2001년에 제정됐다. 하지만 현재 세월호 특별법이 그렇듯, 시민사회를 상징한 참여연대가 주장한 내용이 고스란히 담기지 않은 ‘미흡한’ 법이었다. 대표적으로 고위공직자비리처가 빠졌다. 대신 공익제보자 보호 조치 차원에서 국민권익위원회가 신설되는 작은 성과를 얻었다.

당시 정치권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부패방지법이 뒤늦게라도 만들어지게 된 결정적 계기는 2000년 낙선운동이었다고 이 처장은 평가했다.

“정치부패는 계속되는데 부패방지법은 안 만들어지고 지지부진하고 하니까, 우리가 ‘부패 인사 리스트’라는 걸 만들어 압박했어요. 정치권이 공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거나, 계속해서 담합하고 정경유착하고 그러면서도 불체포 특권을 이용해서 수사에서 빠져나오고···. 그래선 안 된다는 거죠. (대선을 앞두고) 유권자들의 압박을 (국회의원들이) 느끼게 되면서 부패방지법 제정은 훨씬 더 탄력을 받게 됐어요.”

부패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이태호 처장은 지금도 부패에 대해 관심이 높았다. 참여연대가 하는 일 중 ‘권력감시’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만큼, 권력의 부패를 매의 눈으로 지켜봤다. 하지만 이 처장은 20년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부정부패는 쉽게 없어지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만 보더라도 정부 스스로 인정하듯이, 안전이나 다른 경제적 효율성은 다 내팽겨 치는 공무원과 기업의 유착·담합 구조, 관피아 등이 만들어낸 참사라고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잖아요.”

그중에서도 이 처장은 ‘검찰’이 가장 부패된 곳이라고 지목했다.

“(세월호 특별법에) 기소권·수사권이 들어가지 못한 건 청와대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결국 검찰이 반대해서 아니겠어요? 민주화 이후 검찰은 한 번도 제대로 된 적 없었어요. 검찰이 독점하고 있는 수사권·기소권을 매개로 기업을 협박도 하고 타협도 하고, 그러면서 유착되고 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검찰은 서민들에겐 ‘검란’의 존재지만 권력을 가진 자들에겐 ‘도구’가 되는 것 아니겠어요? 심한 말로 ‘권력의 충견’이 되는 거죠.”

참여연대 위기의 순간

시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참여연대는 ‘외부의 위협’에 노출되는 경험을 했다.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한미FTA 반대 촛불집회 등을 벌이면서다.

“이명박 정부 때 ‘촛불’ 단체들에 대한 탄압이 많았잖아요. 그리고 국정원이 동원돼 시민단체에 유형무형의 압박을 놓고 종북단체니 촛불단체니 좌파단체니 하면서 이념적으로 색깔을 칠하려고 공작을 펼쳤죠. 시민단체는 많은 시력을 겪어야 했어요. 반대로 (정부의 탄압에 반발한) 시민들이 훨씬 더 시민단체를 지지해주거나 함께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어요. 재정이나 회원이 더 안정적으로 된 거죠. 그런 면에서 보면, 이명박 정부 때 큰 외부적 위험이 닥쳤지만, 사실은 참여연대가 훨씬 건실해진 계기가 된 것 같아요.”

다른 의미에서 시련을 겪었던 때는 참여정부 때다. 참여정부 후반기에 참여연대는 정체기였다.

“되레 노무현 대통령 임기 후반기 때에 갈등이 굉장히 많았어요. 노무현 정부와 참여연대가 가깝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정작 가깝지도 않았어요. 전략적 유연성, 이라크 파견, 평택 기지 이전, 비정규직 문제, 바다이야기까지···. 당치 참여정부와 참여연대가 대단히 관계있는 것처럼 알려졌는데, 오히려 참여연대는 회원 가입도 둔화될 정도로 평판이 안 좋았어요. 그런 면에서 볼 땐 2006~2007 참여정부 후반기가 가장 큰 위기였던 것 같아요.”

힘든 점도, 아쉬운 점도 있지만 후회는 없다

핵심 간부 중 한 명이었던 이태호 처장이 직접 겪는 어려움도 컸을 것이다. 이를 묻는 질문에 이태호 처장은 잠깐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힘들었을 때는 많았지만, 생각해보면 한순간 한순간이 다 의미가 있던 시간들이었던 것이다.

“제가 직접적으로 힘들었을 때는 천안함 때였어요. 보수단체가 참여연대 앞에 다 모여서 데모(시위)를 하고, 저희가 시민들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의문을 대변했다는 이유로 북으로 가라는 둥 더 이상 저희는 국민이 아니라는 둥, 이런 식으로 참여연대를 맹비난했죠. 아무리 스스로 떳떳하다고 해도 그땐 괴로울 수밖에 없었죠. 집에 가는 길도 무섭고. 외부의 위협에 위축감을 느끼기도 했어요. 그래도 그때는 할 만한 일을 했고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해서 스스로는 실망스럽다는 생각이나 후회는 전혀 안 했고요. 오히려 내가 정말 필요한 일을 했구나 하는 자부심이 있었어요.”

이 처장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돌아보면, 최선을 다할 수 있었는데 못했던 게 몇 가지 기억이 납니다. 예를 들면, 평택 대추리 문제가 있어요. 저희가 평화센터를 만들고 나서 대추리 문제가 처음 터졌어요. 그때 조금 더 적극적으로 대응했으면 어땠을까. 참여연대는 현장에 적극적으로 가지 못하고 ‘이슈리포트’를 내거나 정책적 대응을 한다는 것에만 좀 머물렀던 것 같아요. 제주 강정 해군기지 문제도 저희가 초기부터 제기한 것인데, 2011년 현장에서 공사 저지 싸움이 일어나기 전까지 우리가 충실히 강정 주민들의 억울함이라든가 답답함을 대변하진 못했다는 아쉬움도 있어요.”

권력감시, 그리고 시민참여

그러면서 이태호 처장은 참여연대가 성격상 ‘권력감시 단체’라는 점을 강조했다. 입법, 행정, 사법, 경제 등 사회의 권력을 모두 감시했고, 더 나아가 시민들의 권리를 확장하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이 처장은 평가했다. 그 점에서 참여연대는 실제 많은 성과를 만들었다.

“현장이 꼭 싸우는 곳만 있는 것은 아니에요. 어쨌든 참여연대는 권력감시 단체니까 국회도 현장, 공정거래위원회도 현장이거든요. 어찌 보면 가장 치열하게 부딪치는 현장은 법원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런 현장에서 어떻게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나 그들에게 필요한 정책을 대변하는데 충실할 수 있느냐도 저한테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예요.”

하지만 참여연대가 스무 살이 되는 동안 사회는 변했고, 그에 맞게 참여연대도 맞춰나갈 필요성에 대해 공감대도 형성됐다.

“예전에는 참여연대가 앞장서서 누군가를 대신해주는 역할을 해왔다면, 지금은 시민들이 스스로 자기 목소리 내고 있어요. 수많은 인터넷 카페가 있고, 페이스북이 있고, 1인 미디어가 있고. 시민 스스로 자기 문제를 대변하기도 하고 자기 권리를 위해 싸우기도 하는, 시민이 조금 더 주도적으로 사회 변화에 참여하는 그런 시대가 온 거죠. 그렇다면 참여연대는 앞으로 단순히 누군가를 대신해주는 것 말고 (시민들)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마당이나 놀이터 같은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점에서 개선하고 쇄신해야 한다고 느꼈어요.”

그러면서도 참여연대의 본래 성격도 잊어서는 안 된다며 이 처장은 다시 ‘권력감시’ 역할을 상기시켰다.

“세월호 참사 이런 걸 보면서 ‘여전히 너희는 권력감시 단체인데 권력감시 제대로 하는 거 맞냐’는 질문을 받았어요. 그래서 농담 삼아 ‘우리가 잘못했다’고 얘기해요. 그런데 꼭 농담만은 아니죠. 세월호 참사는 오히려 권력감시 단체가 충실했는지 질문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권력감시 단체로서의 안정성, 전문성, 이런 것도 굉장히 중요하겠습니다.”

특히 이 처장은 “지금처럼 양극화된 사회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 억울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대변인, 소리통, 전달자 역할 충실하게 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이 아주 기초적인, 변함없는 사명인 것 같아요”라고 강조했다.

이 처장이 아쉽다고 느끼는 점은 시민단체와 보조를 맞출 수 있는 전문가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전문가들이 최근에 와서는 너무 시장에 편입되어 있거나 국가에 편입돼있는 것 같아요. 전문가들이 제 목소리 내면 세월호 참사는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거예요. 그런 점에서 본다면 전문적인 권력감시 운동을 계속 꾸준히 해나고, 적극적인 전문가들을 발굴하고 훈련하는 게 필요한 것 같아요.”

참여연대와 정치

박원순 서울시장, 조희연 서울교육감, 김기식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 모두 참여연대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는 행정가 또는 정치인이다. 모두 보수정권인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에 진출했다. 어떻게 보면 참여연대 활동의 폭이 더욱 넓어질 수 있는 가능성도 엿보인다. 이태호 처장은 이에 대해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90년대 이후 성장한 시민리더십의 일부가 남아있어야 하지만 또 정치가 워낙 새로운 주체, 리더들을 외부로부터 수혈하려고 하기 때문에, 가치판단을 떠나, 사회적 현상이라고 봐요. 그런데 새로운 리더를 외부에서 수혈하려고 해도 비교적 훈련된 사회계층이 매우 제한적이에요. 그래서 시민사회운동에서도 끌어당기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 처장은 정치권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분명히 선을 그었다. 그야말로 권력감시의 역할을 충실히 하겠다는 의미다.

“시민운동은 정치 진출의 ‘후비대’ 아니냐 이런 평가를 받을 수도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지난 날과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지금 시민운동은 폭발적으로 성장해서 굉장히 안정화되어 있어요. 또 정치권에 불려 들어갈 일도 객관적으로 없을 거예요.”

참여연대 사무처장 연임 이후에는?

이 처장은 2년 임기의 사무처장을 연임하면서 올해로 4년째 사무처장을 맡고 있다. 오랫동안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지만, 이 처장은 오히려 실무적인 일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이제는 실무적인 일을 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어요. 시민운동을 떠날 생각은 전혀 없어요. 간부를 너무 오래해서 실무를 잘 모르고 굉장히 무능력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아요. 오히려 사무처장직을 벗게 된다면 초심으로 돌아가서 실무적인 역할을 해보고 싶어요. 특별한 분야에 대해 집중해서 활동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사무처장이 되기 전에 평화군축 분야, 반부패나 정치개혁 분야에서 일을 했었기 때문에 그 분야 어느 것 중에 하나라도 꼭 다시 구체적인 실무부터 시작하는 일들을 해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