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있어야 할 자리를 대신한 것은 세월호의 숨은 영웅들이었다. 이들은 생사의 기로에서 희생을 선택하면서 실의에 빠진 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그리고 눈물을 안겼다.
“언니는 구명조끼 안입어요?”
“선원들은 맨 마지막이야. 너희들 다 구하고 난 나중에 나갈게”
선내 방송을 담당하던 세월호 승무원 고(故) 박지영(22·여)씨는 침몰하던 세월호에 끝까지 남아 학생들을 구출했다. 선장과 항해사 등이 빠져나간 자리에서 승객들과 생사를 함께한 이도 박씨였다. 그는 4층에서 구명조끼를 구해 3층 학생들에게 건넨 뒤 가슴까지 물이 차오르는 상황에서도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안내방송을 하는 등 안간힘을 썼다.
사무장 양대홍(45)씨는 아내의 전화를 받고 “지금 아이들 구하러 가야 해. 길게 통화 못해. 끊어”라는 말을 남기고 실종됐다. 양 사무장은 침몰 당시 급박한 상황에서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배가 많이 기울었다. 통장에 있는 돈으로 아이들 등록금을 하라. 지금 학생들 구하러 가야된다”고 말해 눈시울을 적시게 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순간 가장 먼저 자녀의 등록금을 떠올린 그는 배에 타고 있던 학생들을 구하다 목숨을 잃었다.
사무원 정현선(28·여)씨와 불꽃놀이 행사 담당 아르바이트생 김기웅(28)씨는 결혼을 약속한 연인이었는데 승객을 구출하러 기울어지는 선내로 다시 들어갔다가 함께 숨진 것으로 전해졌다.
끝내 세월호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시신으로 발견된 고(故) 최혜정(24·여) 단원고 교사와 고(故) 남윤철(35) 교사도 선체가 급격히 기울어져 자신의 몸도 추스르기 힘든 상황에서도 학생들을 구조하다 사망했다. 교사들에게 재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대처방법 같은 매뉴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가장 위기인 순간, 제자들을 먼저 떠올린 것은 교사만의 본능이었다. 남 교사는 사고 당시 자신은 얼마든지 먼저 탈출 수 있었음에도 학생들에게 구명조끼를 챙겨주고 “빨리 바다로 뛰어내리라”고 외쳤다. 생존한 학생들은 “선실로 내려간 모습이 선생님의 마지막이었다”고 증언했다.
최 교사는 배가 침몰하는 상황에서도 학생들이 많이 있던 선미부분으로 이동해 10여명의 학생을 구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페이스북에 “걱정하지 마. 너희부터 나가고 선생님 나갈게”라고 글을 올리며 학생들을 안심시켰다.
평소 학생들에게 "바다 ‘해’ 봉황 ‘봉’. 바다의 ‘킹왕짱’"이라고 소개해온 이해봉(32)교사는 난간에 매달린 학생 10여명을 구한 뒤 세월호와 함께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제자들은 “바다의 킹왕짱이라더니 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느냐”며 눈물을 흘렸다.
다수의 학생들도 친구들 구조에 나서면서 목숨을 잃었다. 안산 단원고에서 첫 사망자로 확인된 고(故) 정차웅(18)군도 자신이 입고 있던 구명조끼를 친구에게 건넨 뒤 친구를 구하다 숨졌다. 검도 3단 유단자로 미래의 체육학도를 꿈궜던 정 군은 생일을 하루 앞둔 상태에서 사망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음악으로 환자를 치유하는 음악심리상담사가 되겠다며 서울대 진학을 목표로 공부했던 양온유(17)양은 갑판까지 나왔다가 방에 남아 있는 친구들 구한다고 다시 배 안으로 들어갔다 사망했다. 계속 갑판에서 대기하고 있었다면 헬기로 구조될 수 있던 상황에서도 그는 친구들 울음소리를 듣고 구명조끼도 입지 않은 채 다시 배 안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넉넉지 못한 형편에 도움이 되려고 남들이 학원가는 사이에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해온 착한 마음씨를 가진 온유양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들은 모두 죽거나 실종된 모습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정부 당국이 구조만 빠르게 했어도 이 영웅들은 모두 우리와 함께 살아갈 수 있었다는 점에서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을 것이다.
안산 시내에는 노란 리본과 함께 수없이 많은 손글씨 정성껏 적은 쪽지가 곳곳에 붙어 있다.
대표적인 곳이 안산시 월피동의 작은 가게인 ‘삼일마트’다. 지난 16일 굳게 닫힌 이 상가의 철문에 ‘단원고 우리 승묵이를 지켜주세요’라는 글귀가 부착됐다. 이 사실이 언론 등을 통해 알려진 이후 승묵이와 단원고 학생들의 생환을 바라는 학생과 주민들의 쪽지는 나날이 늘었다.
강군의 한 친구는 쪽지에 “너와 마지막으로 카톡하고 없어지지 않는 ‘1’이 너무 마음 아프다”고 적었다. 그는 “너 겁쟁이라 어두운데 무섭잖아. 너랑 냉면 먹고 온지 며칠 됐다고 갑자기 이러니까 진짜 실감이 안나. 제발 너 나보고 울지 말라고 해놓고 너 땜에 울게 하면 진짜 안 된다 너”라고 애타게 그리워했다.
삼일마트 건너편 한 초등학교의 학생들은 스스로 이 쪽지들이 떨어지거나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 수시로 관리했다고 한다. 온 국민이 승묵이군의 생존 소식을 듣고자 삼일마트 소식에 귀 기울였다. 그러나 철문에 ‘승묵이가 돌아왔다’는 글귀가 붙을 것으로 믿었던 국민들의 염원과는 달리 그는 끝내 주검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쪽지와 노란리본은 전국 곳곳으로 확산됐다. 분향소가 있거나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곳곳에 세월호 희생자, 실종자들을 위한 쪽지와 노란리본이 빼곡하게 붙어 있다. 쪽지와 노란리본 안에 담긴 메시지는 희생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한편 이번 사고로 충격과 상처를 받은 이들이 서로에게 건네는 위로와 치유의 한마디이기도 했다.
4월 17일 캄캄한 경기도 안산 단원고등학교에 교복을 입은 앳된 학생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단원고 학생도 있었고, 인근의 다른 학교에서 온 학생들도 있었다.
이들은 이날 오후 8시30분 어둠으로 적막한 교정에서 ‘단원고 학생들의 무사귀환’을 염원하는 행사를 열었다. 학생들은 '배고프지?', "희망 잃지 마", "보고 싶어", "이번주까지 돌아와줘", "모두들 무사히 돌아와줘" 등 친구들을 향한 마음을 담은 글을 8절지 크기의 종이에 적었다. 촛불 대신 스마트폰 불빛을 켰다.
이튿날에도 단원고 교정에는 학생들이 찾아왔다. "포기하지 말자", "돌아올 수 있다"는 무사귀환 염원은 이 날도 계속됐다. 그러나 정부의 수색이 더딘 것을 지켜본 학생들 사이에서도 '돌아올 수 있을까'라는 우려는 있었다.
그때 학생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 학교 교사였다. 한 교사가 앞으로 나와 "얘들아, 많이 힘들지?"라고 인사하자 교정은 순식간에 눈물바다가 됐다. 곳곳에서 참았던 눈물을 흘리면서 흐느끼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살아남은 자가 죄인이 된 그때, 이 교사도 힘들게 한마디 한마디를 이어갔다. 그는 "진정한 용기는 포기하지 않는 거다. 포기하지 말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끝까지 기다리자"고 했다.
학생들이 "친구들이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시각, 정부는 부실구조를 되풀이했다. 생존자와 구조자수마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그러나 그 시각에도 무사 귀환할 수 있다는 믿음을 저버린 학생들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 정부가 친구들을 구할 것이다”, “내 친구들이 살아서 돌아올 것이다.”라는 염원을 담아 학생들은 스마트폰 불빛을 켰다.
4월 17일 오후 7시 화랑유원지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어둠이 내리면서 촛불도 하나둘씩 켜졌다. 촛불을 든 사람들은 가만히 고개를 숙였고, 곳곳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나왔다.
수백명이 바다에 빠진 상황에서 미안하고, 구조가 되지 않는 모습에 답답했던 국민들은 거리로 나와 촛불을 들고 생존을 기도했다. 촛불기도회에서 시민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써온 편지를 읽었다. 실종 교사들의 제자들은 "교사의 무사 복귀"를 염원했고, 다같이 노래를 불렀다.
사고 초기만 해도 촛불은 ‘무사귀환’을 뜻했다. 그러나 촛불에서 나온 글귀가 “기다릴게”에서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로 바뀌는 순간 촛불은 무책임하고 무능한 정부에 대한 말없는 시위로 변했다.
배가 침몰하는 동안에도 ‘가만히 있으라’는 선내 방송을 따르다 목숨을 잃은 어린 학생들, 그들을 내버려 둔 채 구조하러 온 해경 보트를 타고 배를 빠져 나온 선원들 등을 지켜본 국민들, 선내에는 진입도 하지 않는 등 체계 없이 우왕좌왕하다 생명을 살릴 귀한 시간을 날려 버린 당국, 부실구조에 급급한 정부의 모습에 분노한 시민들은 “이제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겠다”며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생존을 염원하는 촛불기도회 명칭도 촛불추모제로 바뀌었다. 안산에서 시작한 촛불은 서울 28곳을 비롯해 1일 현재 전국 153곳으로 확대됐다.